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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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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단 안보 체제의 붕괴 === 유럽 전체의 긴장이 폭증하기 이전, 이탈리아에서 파시스트들이, 독일에서 나치가 집권하고 주요 열강에서 극우 세력들이 준동하기 시작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이념적으로 공존이 어려우며 잠재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 적대 국가들이 탄생했다고 판단했다. 한편 정반대편에 있었던 소련은 독일이라는 강대국이 극우 세력에게 넘어간 것에 위협을 느꼈다. 파시즘 덕분에 서로에 대한 악감정이 완화되고 이해가 일치하자, 영 · 프 · 소 3개국은 다시 옛 협상국 체제를 집단안보체제라는 이름으로 부활시켰다. 소련이 폴란드, 발트 3국,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핀란드 등의 국가와 불가침조약을 맺고 프랑스가 소련, 체코, 영국과 상호안보협정을 체결했으며 소련의 국제연맹 가입도 주선했다. 그러나, 이 집단안보체제가 효과를 보려면, 붉은 군대가 체코슬로바키아나 독일 국경으로의 접근이 가능해야 했다. 그러나, 소련과 역사적으로 악연이 있었던 [[폴란드 제2공화국|폴란드]]는 협력을 거부했으며, [[루마니아 왕국|루마니아]]는 부코비나 지방에 대한 군사 통행권만을 제공했다.[* [[러시아 내전]] 당시 백군을 제압한 적군은 곧바로 [[러시아 제국]] 영토 수복과 [[중유럽]] 혁명 수출을 목적으로 동유럽을 향해 침공을 감행했고, 이 과정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중흥을 꾀한 폴란드와의 사이에서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이 발발했다. 루마니아도 러시아 제국의 붕괴를 틈타 베사라비아를 장악했고, 이 때문에 전간기 내내 소련과 영토 분쟁을 벌였다.] 그러나, 라인란트 재무장, 스페인 내전, 안슐루스, 뮌헨 협정과 같은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집단안보체제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독일의 위협이 더욱 거세지는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영국 · 프랑스와 협력을 재확인하려 한 [[이오시프 스탈린]]은 레닌그라드 회담을 주선했으나, 영국 · 프랑스 협상단의 성의 부족에 격노했다. 소련 입장에서 이는 충분히 이유가 있는 분노였다. 소련의 협상단 대표는 스탈린의 최측근이자 국방부 장관인 [[클리멘트 보로실로프]]였다. 게다가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으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으며 이를 증명하는 위임장도 영 · 불 협상단에게 보여주었다. 협상단에는 스타브카의 핵심 장성들이 포함되어 있었을 정도로 소련은 이 협상에 정말 진지하게 임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협상단 대표인 조제프 두망 장군이 협정에 서명할 권한을 위임받았고 개전시, 110개 사단을 지원하겠다는 약속을 했다. 양측 대표의 격이 너무 차이났다는 점[* 두망 장군은 프랑스군 서열 40위 정도의 인물이었는데 보로실로프는 스탈린의 최측근이었다.]을 제외하면 나쁘지 않은 내용으로 여겨질 수 있었으나, 공동의 적에 대한 적극적인 공세와 협력을 원했던 소련에 비해 프랑스는 협정 국가들이 개별적으로 자국을 방위하며 요청이 들어오는 경우에만, 공동의 적에 함께 맞서자고 답했다. 영국의 경우, 대표로 온 레지널드 드락스 경은 전권 위임은커녕 어떠한 사항에도 동의할 권한이 없었으며, 거기에 더해 소련 측이 '독일이 주변국을 침략할 경우, 소련은 120개 사단을 동원하여 막겠다. 영국은 몇 개 사단을 내놓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자, 파견할 수 있는 지상군이 불과 16개 사단이라고 대답했다. 이 대답을 듣고 나서 보로실로프가 통역이 잘못된 것 아니냐고 진지하게 반문했을 정도로 당황한 소련 측이 재차 질문하자, 영국 협상단 측에서는 사실 그중에서 전투가 가능한 것은 단 4개 사단뿐이라는 대답을 했다.[* 나머지 12개 사단은 급하게 편제 중인 징집병이라 아직 훈련도 못 끝냈기 때문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영국은 10개 사단을 파견했다.] 스탈린은 레닌그라드 회담 종료 후에 영국 대사와의 회담에서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더 구체적인 질문을 했다. 이에 대한 영국 대사의 대답은 "사실 즉각 파견이 가능한 사단은 2개 사단에 불과하며 나머지 2개 사단은 아직 완편되지 않았다"라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답이 나온 것은 영국이 섬나라이기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들보다 육군의 비중이 적었던 점, 대공황으로 인해 급격한 군축을 단행한 점, 과다할 정도로 많은 식민지 방위를 위해 대다수의 육군 사단들을 식민지에 분산 배치해야 했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 영 · 프 양국이 회담에 불성실하게 임하고, 핵심적인 논의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채로 회담이 끝나자, 스탈린은 영국과 프랑스가 '소련과 독일을 싸움 붙인 후에 [[어부지리]]를 기대하는 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동유럽과 남유럽을 영국과 소련이 나눠 갖자는 퍼센트 합의가 무산되고, 1945년의 대공세를 통해 소련이 유럽의 중부와 동부를 장악하자, 처칠은 [[언싱커블 작전]]을 입안했다가 내부 반대로 이를 취소했다. 영 · 소 양국의 관계는 불신과 협력을 반복하며 서로를 완전히 믿지 못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레닌그라드 회담이 소득없이 끝나자, 이때를 노린 독일은 스탈린에게 발트해부터 흑해까지의 결산을 제안했고 스탈린은 이를 받아들였다. 1939년 8월 17일 독•소 신용협정이 체결되었고 해당 협정 회담에서 양국은 상호 불가침조약 체결 의사를 교환했다. 8월 20일과 21일 히틀러와 스탈린은 상호 불가침조약 협상을 협의했고 8월 23일 외상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보내 다음날인 24일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앞선 영국•프랑스 대표단과 달리 리벤트로프는 전권을 가지고 있었다. 스탈린 역시 히틀러만큼 진심이었는데 리벤트로프를 비롯한 독일 협상단을 극진히 대접했다.] 양면 전쟁을 무조건 피하려 했던 히틀러의 의중이 강하게 작용한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을 위해 히틀러는 동유럽의 발트 3국과 핀란드, 폴란드 동부를 넘겨주었고 당연히 스탈린은 쌍수를 들며 환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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